라이프로그


만물은 서로 돕는다 - 크로포트킨 독서

고대 철학에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선과 악을 기준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성선설과 성악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두 개념 모두 인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있는 풍부한 사례를 인간사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논쟁의 중심에 있였다. 다윈이 <종의 법칙>을 통해 '자연선택에 의한 생물의 진화'을 정립한 이래 진화론을 해석하는 방식에서도 저 대립이 지속된다. 다윈의 추종자였던 헉슬리 뿐만 아니라 진화론을 사회학에 접목시켜 '생존 경쟁'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스펜스도 '생존 경쟁'이라는 용어에서 보듯 인간까지 포함한 생물의 진화가 투쟁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진화는 투쟁이 아니라 상호 부조를 통해 진행된다는 반대 주장이 대두된다. 지금은 경쟁과 협력이 공히 진화에 기여한다고 정립되어 있지만 1900년대 초, '생존 경쟁'의 논리가 기세등등하던 때에 상호 부조를 통해서 진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었고 그 중심 인물이 크로포트킨이다. 그의 주장을 담은 책이 다음에 보이는 '만물은 서로 돕는다'이다.


저자는 상호부조를 진화의 중요한 법칙으로 내세우지만 생존 경쟁을 배제하고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투쟁을 통한 진화'의 개념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것을 우려하여 대립되는 개념을 좀 더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루소는 자신의 사상에서 부리와 발톱의 싸움을 배제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헉슬리는 그와 정반대되는 실수를 저질렀다. 루소의 낙관주의도, 헉슬리의 비관주의도 자연을 공정하게 해석했다고 인정하기는 힘들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다원을 따르는 과학자들 중에서 상호부조가 자연 법칙이자 진화의 으뜸가는 요인이라는 점을 제대로 이해 한 최초의 인물은 러시아의 저명한 동물학자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학장이었던 케슬러 교수였다."


진화론은 불가피하게 역사적 검증 방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고, 그를 통해 상호부조가 진화의 중요한 법칙임을 주장하게 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사회생활이야말로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생존경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모든 다윈주의자들은 지적인 능력이 생존경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지속적인 진화의 가장 강력한 요인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들은 또 지능이 사회적 능력의 하나임이 분명하다는 점도 역시 인정할 것이다. 언어, 모방, 축적된 경험은 지능 발달에 꼭 필요한 요소이며 사회성이 없는 동물에게는 이런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동물학과 고민족학에서는 최초의 사회생활 형태가 가족이 아니라 집단이라고 보는 데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고삐 풀린 개인주의는 근대의 산물이지 원시 인류의 특징이 아니다."


20세기 초는 아직 진화론이 유전학과도 결합되기 전이었다. 역사적 검증과 논증을 통해 진화에서 상호부조가 차지하는 역할을 추론해 내었다는 점에서 저자의 통찰력은 탁월했다고 볼 수 있으나 여전히 과학적 검증으로서는 불충분했다는 점도 아울러 이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윤리 개념이 생물의 사회성에 있다는 통찰력을 보이면서도 결론은 논증의 형식으로 한다.
"상호부조가 우리의 윤리 개념의 참된 기반이 된다는 점은 아주 자명하다."
"우리는 진화의 최초 단계에서도 이미 상호부조의 관행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윤리적 개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확연히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윤리적 진보 과정에서 상호투쟁이 아니라 상호지원이 주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해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이런 원리를 넓게 확장해나가는 것이 앞으로 인류가 더 높은 단계로 진화하리라는 것을 가장 잘 보증해주는 일임을 잘 알고 있다."


이 책에는 생물들의 사회성과 상호부조에 대해 다양한 관찰 결과들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결과들은 지금은 이미 정설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그래서 이 책의 독서 추천은 '일독을 권함'으로 한다.



말을 바꾸었다고? 누가? 정치, 사회



조중동과 종편으로 지칭되는 꼴통 언론들의 기사 장난질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어서 새삼스럽게 거론할 게 못된다. 그저 기회만 닿으면 제거해야 할 암덩어리일 뿐이다. 그런데 마이너 언론들도 여론 영향력이 적어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않아서 그렇지 기사 장난질은 메이저 못지 않다. 먼저 기사를 보자.

http://v.media.daum.net/v/20170117033617037

"한·일 위안부 합의 직후 유엔 홈페이지에 “한국과 일본이 맺은 위안부 합의를 환영한다”고 밝힌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16일 부산의 유엔평화기념관을 방문한 뒤 기자들과 만나 “그때 말씀드렸던 건 수십년 현안이었던 문제를 박근혜 정부 때 처음으로 합의한 것이라 평가할 만하다, 환영할 만하다고 말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사드 배치에 대해 신중한 행보를 보여 왔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지난 15일 언론 인터뷰에서 “한·미 간 합의를 취소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해 입장을 선회한 게 아니냐는 추측을 낳았다. 지난해 7월 사드 배치에 대해 “득보다 실이 많은 합의”라고 비판하며 재검토를 촉구했던 문 전 대표는 지난해 12월 외신기자클럽 간담회에서 “다음 정부로 사드 배치 진행을 미루는 것이 옳다”고 신중론을 폈는데 이번엔 현실론으로 해석될 만한 발언을 한 셈이다."
"문 전 대표 측은 “진폭은 있지만 문 전 대표는 (신중론에서)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며 “찬반 입장을 밝힐 거였다면 다음 정부로 넘기라는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짤방 이미지로 올려둔 비교표를 보면 반기문은 말을 바꾸지 않았다. 그런 반기문과 문재인을 엮어 말바꾸기라고 도매금으로 엮는 솜씨를 보니 이것들도 보통 꼴통이 아니다. 문재인도 말바꾸기를 한 적 없다. 말바꾸기라고 하려면 사드 배치를 반대한다고 했다가 찬성한다고 뉘앙스를 풍기든지, 한-일 위안부 협상이 잘되었다고 했다가 잘못되었다가 했어야 한다. 그런데 문재인은 초지일관 사드 배치는 간단히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위안부 협상은 잘못되었다고 했다. 비교표 어디를 봐서 문재인이 말을 바꾸었는가? 더욱 고약한 것은 반기문도 말을 바꾼 적은 없는데 한발 물러선 듯한 표현을 가지고 말을 바꾸었다는 식으로 기사를 작성했다는 점이다.

마침 내각제와 관련하여 두 신문이 기사 제목을 뽑은 것을 보면 그 악의성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한번 감상해 보자.

http://news1.kr/articles/?2887665

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JF21&newsid=03991766615798704&DCD=A00602&OutLnkChk=Y

뉴스1은 문재인이 책에서 이야기한 대로 "처음 헌법을 만들 때라면 내각제가 더 좋은 제도"라고 제목을 뽑았다. 그런데 이데일리는 "내각제 만지작, ... 책으로 색깔 드러낸 문재인"이란다. 문재인이 평소 이야기할 때는 "지금 상황이라면 내각제는 일본과 같은 형태가 될 가능성이 크므로 4년 중임 대통령제를 선호"한다고 했는데 이 제목만 보면 문재인이 내각제로 선회할 수도 있는 것처럼 연기를 피운다.

연합뉴스 TV는 자막에 '반기문-문재인 ...'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우리는 관습적으로 우위에 있는 존재를 먼저 언급한다. 그런데 저 표현은 지지율 순위에도 맞지 않고, 가나다 순도 아니다. 이런 크고 작은 왜곡들이 만성화되어 있어서 문제가 심각하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 난관을 극복할 수 밖에. 아무튼 이런 비상식이 사라지게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응징은 할 수 있는 상식적인 세상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정권 교체가 되어야 하는 큰 이유중의 하나이다.






반기문이 해괴하다 정치, 사회

http://forum.chosun.com/bbs.message.view.screen?message_id=1243191&bbs_id=1010¤t_sequence=05DQv~&start_sequence=zzzzz~&start_page=1¤t_page=7&list_ui_type=0&search_field=1&search_word=&search_limit=all&sort_field=0&classified_value=&cv=


반기문이 대권 도전 전후의 생각들을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그런데 이게 좀 해괴하다.

http://news1.kr/articles/?2887263

"반 전 총장은 "당적이 없이 홀로 하려니까 캠프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금전적으로 어려움이 있고 빡빡하다"며 '종국적으로 당과 함께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기자들의 관측에 "그렇게 될 것"이라고 했다."
"개헌에 대해서도 다소 구체적인 입장을 내놨다. 그는 "개헌은 지금 불가능하다. 대선 전 개헌은 사실상 어렵다"며 "대통령이 된 사람이 개헌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권도전 계기에 대해서는 "유엔 사무총장 연임을 한 이후 딱히 정치 생각이 없어 여론조사시 이름이 거론될 때 빼달라고도 했다"며 "그러나 최순실 사태가 불거진 이후 (일각에서) '당신이 아니면 안된다'는 말을 들어 '이게 운명이구나' 생각했다"고 전했다."


대권 도전 선언 이후 반기문도 검증의 칼날을 피해 갈 수 없고, 몇가지 해프닝을 남겼다. 입국 때부터 민폐 행보니 뭐니 해서 뒷말이 많았지만 그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물론 반기문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말고, 반기문에게 목을 매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예전에 정몽준이 버스 요금을 몰라 구설수에 오른 적도 있다시피 오랫동안 고위층으로 의전을 받으며 지낸 인간이 서민들의 생활을 알 리가 없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서민 코스프레 하다가 흔히 구설수를 남기곤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자칭 보수라고 생각하는 인간들도 '무능보다 부패가 낫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유능하다고 생각되기만 하다면 그런 해프닝은 전혀 문제가 안된다. 그걸 단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이명박이었다.

게다가 반기문은 헛소리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기사의 인용 구절에서 보듯, 당적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 기꺼이 동의하고, 대선 전 개헌은 어렵다는 이야기도 한다. 여기서 문제가 드러난다. 반기문은 정당을 선택한다고 해도 새누리당은 아니라고 했다. 해보는 소리인지 진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믿어줘 보자. 그러면 남은 것은 '국민의 당'과 '바른 정당'인데, 국민의 당은 어쨎든 진보 색채의 야당으로 분류되고, 바른 정당도 새누리당에서 싸우고 갈라져 나간 정당이니 새누리당과 차별화를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는데 그리로 간다? 자신이 '진보적 보수'라는 웃기는 이야기를 하는 만큼 야당 성향이라고 못갈것 같지는 않긴 하다. 그런데 국민의 당에는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는 안철수가 버티고 있는데다 박지원이라는 능구렁이 버티고 있어 결코 같이 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바른 정당 뿐이다. 그런데 실은 바른 정당 행도 문제가 있다. 짤방 이미지는 조선일보에서 가져온 것인데 그게 유엔 사무총장 시절에 찍힌 사진이다. 저 사진이 아니더라도 박근혜가 탄핵 당하기 전에는 반기문은 새누리당의 인간이었다. 자신을 유엔 사무총장으로 사실상 만들어 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조문은 이리저리 눈치보았던 인간이, 박근혜가 탄핵 당한 지금 잘 견디라고 덕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인간은 박근혜의 탄핵이 기각될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음이 틀림없다. 바른 정당은 박근혜를 발로 차고 나간 인간들이 모인 집단인 만큼 당연히 반기문에게 박근혜와 선을 긋기를 요구할 것인데 반기문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니 바른 정당 행도 나가리다. 반기문은 그럼 어디로 가나? 결국 어디로 가든 자신이 지금 한 말을 뒤집어야만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더욱 해괴한 것은 기사 인용의 마지막 구절에 나온다. 최순실 사태를 접하고 자신의 대권 도전이 운명이라고 느꼈단다. 최순실이 국정을 농단하여 큰 혼란을 초래했고, 박근혜의 탄핵은 그 혼란을 수습하는 출발점이다. 그런데 반기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박근혜가 탄핵된 게 국가 혼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 드디어 '구국의 영웅'이 나셨다. 반기문도 천상 박근혜과인데 새누리당으로는 안간다고 말해 놓았으니 그 수습을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자.






신념의 두 얼굴 정치, 사회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publishDate=1996-10-24&officeId=00028&pageNo=1


한 개인이 가진 신념은 그 개인을 영웅으로 만들기도 하고 악당으로 만들기도 한다. 여기 신념에 찬 악당이 하나 있다. 기사를 보자.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78816.html

"그의 이름은 수사 기록과 재판 기록 몇 군데에 등장한다. 고문 경찰관들은 다들 사건 경위서를 작성한 인물로 그를 지목한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 사건 경위서에 처음 등장해 어느덧 전설이 돼버린 저 ‘악마의 문장’의 ‘공식 저작권자’는, 그러나 사건 당시 거의 주목받지 않았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다."
"홍승상(79). 1987년 5월29일, 검찰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2차 수사를 마무리하고 고문 경찰관 3명과 사건 은폐 지휘관 3명을 추가 기소했다. 그도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지만 기소 대상에서 빠졌다. 법원에 제출된 수사기록에는 그의 진술조서조차 들어 있지 않다. 그는 운 좋게 관심의 사각지대에 비켜서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실제로 무구했던 것일까? 혹,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비호된 것은 아닐까?"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드러난 후 민중의 분노는 6월 항쟁으로 이어져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한 획을 긋게 된다. 그리고 30여년이나 지난 지금, 그 사건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 아직 살아 있지만 내막을 속시원하게 털어놓지 않는다. 이건 신념이라기 보다는 두려움이나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 인간 말고도 확연하게 신념에 찬 인간들이 있었다.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는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암살의 배후를 불지 않았다. 짤방 이미지에서 보듯 마찬가지로 신념에 차 있던 권중희씨에 의해 피살되어 생을 마감했다. 결국 백범 암살 사건의 진상을 무덤까지 가져간 것이다.

또 있다. 고문 경찰로 악명이 높았던 이근안은 구속되었다가 형기를 마치고 나와 목사로 변신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때의 행동의 간첩을 잡기 위한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강변하고 다닌다.

신념은 이렇게 결과를 보고도 그 결과 마저 왜곡시키는 힘이 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반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영웅주의 사관이 주류였던 시대에는 신념이 크게 환영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의 생각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은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확률이 더 크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 전에는 신념의 결과가 옳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일베 교육 자료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정치, 사회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에서 식민지 지배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무식한 일베들에게 해 줄 이야기가 없을 리가 없다. 하나씩 보자.

http://blog.ohmynews.com/yby99/305937

"역사가들은 19세기 서구국가들에 의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화를 용서하면서, 그 근거로서 그것이 세계 경제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뿐만 아니라 그것이 그 두 대륙의 후진 국민들에게 가져다 준 장기적인 결과까지도 내세우고 있다. 결국 근대의 인도는 영국의 지배가 낳은 자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제국주의 시대를 옹호하는 전형적인 논리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논리에 대한민국의 지식인들 중에서도 동조하는 인간들이 꽤 있고, 거기에 덩달아 일베들도 깨춤을 춘다.

https://ko.wikipedia.org/wiki/%ED%94%84%EB%A6%AC%EB%93%9C%EB%A6%AC%ED%9E%88_%EC%97%A5%EA%B2%94%EC%8A%A4

"엥겔스의 화려한 글 …… "역사는 모든 여신들 중에서도 아마 가장 잔인한 여신일 터이니, 그녀는 전쟁의 시기뿐만 아니라 '평화로운' 경제적 발전의 시기에도 시체더미 위로 승리의 전차를 몰아댄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인간은 너무나 어리석은 나머지 거의 견디기 어려울 만큼의 고통을 당하여 내몰리지 않고서는 진정한 진보를 위해서 결코 용기를 내지 않는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더불어 마르크스주의 창시자의 한사람이다. '마르크스' 또는 '혁명'이라는 말에서 곧바로 '빨갱이' 또는 '종북'을 연상하는 놈들은 전형적인 일베라고 할 수 있다. 이 엥겔스가 한탄하기를 탄압받는 노동자들이 저항에는 너무나 더디다는 것이다. 이는 엥겔스 만의 한탄이 아니다. 중국에도 쑨원이 중국 인민들을 계몽하려다가 한 한탄이 이와 비슷하다. "중국 농민들은 우물한 개구리들이다. 그런데 이 개구리들을 우물 밖으로 꺼집어 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사적이고 사악한 의도를 품은 일베들의 이데올로그나 집행부를 제와한 일베 추종자들은 탄압에 저항하라는 것에 대해 그 탄압에는 저항하지 않고 저항하라는 그 사람들을 향해 저항하는 본말이 도착된 인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https://namu.wiki/w/%EB%AC%B8%EC%9E%AC%EC%9D%B8

"도덕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바람직한 것뿐만 아니라 현실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세력까지도 고려하는 것, 그리고 아마 부분적일 것임에 틀림없을 당면한 목적의 실현을 위해서 그 세력을 지도하고 조정할 수 있는 방법까지도 고려하는 것이 정치인의 직무라고 할 수 있다."

이건 일베들에게라기 보다는 일베들에게 이용당하기 딱 좋은, 그 전에게 노무현에게 요구했었고, 지금은 문재인에게 요구하는, 완벽한 인간이 되기를 요구하는, 그리고 자신들의 요구만이 절대 선이라고 생각하는, 자칭 개혁적이라는 인간들이 명심해야 할 이야기이다. 문재인이 '천안함 폭침'이라고 (표현)했다고 흥분하고, 박정희 묘에 참배했다고 흥분하는 그런 인간들 말이다. 그런 인간들 뒤에서 문재인 까기에 동참하는 일베들은 두말 할 필요도 없고.

말이 씨가 먹히든 아니든 계속 꼴통 교육을 시키다 보면, 확인할 방법이 없긴 하다만 그래도 열에 하나 정도라도 자신을 되돌아보고 꼴통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인간들이 있기를 기대해 보자. 없으면? 그럼 말고.






박원순, 다시 인간 냄새를 풍기다 정치, 사회



박원순이 문재인을 세게 비판했다가 그게 본심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기사를 먼저 보자.

http://v.media.daum.net/v/20170114151758237

"대선 출마선언을 앞둔 박원순 서울시장은 14일 문재인 전 대표의 안방인 부산을 찾아 원전반대 시민단체, 민주당부산시당 관계자 등을 만나는 등 지지세 확장에 나섰다."
"그는 "평화의 소녀상이 시민과 특히 미래세대 대학생들에 의해 건립된 것에 대해 경의와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면서 "소녀상은 시민들의 모금을 통해 만든 민간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정부가 철거를 결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부산시당 관계자, 당원 등과 함께 한 오찬간담회 자리에서는 "문 전 대표와 관련한 악의적인 표현은 너무 나간 것이다. 본심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박원순은 좌냐 우냐, 보수냐 진보냐, 이런 문제가 아닌 상식적인 인간의 판단을 여러번 보여준 바 있다. 물대포에 물을 공급하지 않겠다고 한 결정은 그냥 법규를 상식적으로 해석한 것일 뿐이다. 그게 유일한 원인은 아닐지라도 건전한 시위 문화가 정착되는데 일정 정도 기여했음이 분명하다. 기사에서 보듯, 민간이 건립한 소녀상을 정부가 철거하네 마네 할 수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을 한다. 그런 박원순이 황당한 방식으로 문재인을 비판하여 자충수를 두었다가 그게 지나쳤다고 시인했다. 이런 게 인간 냄새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판단 착오도 한다. 실수를 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실수를 하고도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 않겠나. 문재인 지지자들이 굳이 박원순에게 사과를 요구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나마 조금 있던 지지율을 까먹은 것으로 자신의 실수에 대한 댓가는 치루었다고 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람 사는 세상'을 이야기했을 때 이런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처음부터 악의로 시작했거나 무개념 때문에 나쁜 짓을 저지르고도 모르쇠로 버티고, 그런 인간들을 지지한답시고 또 다시 불법을 저지르는 인간들이 너무 많은 요즘,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같은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 아니겠나. 그 전에는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신기루같아 보였지만 지금은 그런 세상이 정말 올 수 있다는 희망이 어느 때보다 높다.






역사란 무엇인가? - E. H. 카 II 독서


지난 포스트에서는 역사학이 당면했던 이원론적 관점에서의 편향과 그것을 극복하는 역사가의 자세에 대해서 주로 요약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중심으로 요약한다.
"프랑스의 수학자 앙리 푸 앵카레 (1854-1912)는 <과학과 가설> …… 푸앵카레의 주요한 논지는, 과학자들이 제출한 일반명제들은 그것들이 단순한 정의(定義)이거나 또 다른 형태의 용어 사용에 관한 규칙이 아닌 한, 사유의 진전을 구체화하고 체계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가설이며, 따라서 증명과 수정과 반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과학자나 역사가 모두 보다 겸손한 희망, 즉 자신의 해석을 매개로 하여 사실을 분리하고 그 사실로써 자신의 해석을 검증하는 가운데 하나의 단편적인 가설로부터 또 하나의 단편적인 가설로 점진적으로 나아 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
"역사가는 항상 자신의 증거를 검증하기 위해서 일반화를 이용한다."
"현재 사회학은 두 가지의 서로 상반 되는 위험- 지나치게 이론적인 것으로 되어가는 위험과 지나치게 경험적인 것으로 되어가는 위험 -에 직면해 있다. 첫번째 것은 사회 일반에 대한 추상적이고 무의미한 일반화에 몰두하는 위험이다. 대문자 S로 시작되는 사회(Society)는 대문자 H로 시작되는 역사(History)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생각이다. 이 위험은 역사가 기록한 특수한 사건들을 일반화하는 것을 사회학만의 독점적인 임무로 삼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더욱 가깝게 다가서 있다: 심지어 사회학은 '법칙'이 있기 때문에 역사학과 구별된다는 주장마저 제기되어 왔다."
"사회학은 역사적 사회들을 다루며, 그 사회들 하나하나는 특수한 것으로서 특정한 역사적 내력(來歷)과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다. 그러나 사례 나열과 분석에 관한 이른바 '기술적인' 문제에 틀어박힘으로써 일반화와 해석을 피하려고 하는 것은 단지 정지된 사회의 무의식적인 옹호자가 되겠다는 것일 뿐이다."
"사회학이 쓸모 있는 연구분야가 되려면, 역사학과 마찬가지로,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의 관계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사회학은 또한 역동적인 학문- 정지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왜냐하면 그런 사회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관한 연구 -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는 이른바 과학의 법칙이란 실제로는 경향에 관한 설명, 즉 다른 조건이 동일할 경우에 또는 실험실의 상태 속에 있을 경우에 무엇이 발생할 것인가에 관한 설명이다."
"현대물리학 이론은 사건이 발생할 수 있을 개연성만을 취급한다고들 말한다. 오늘날의 과학에서는 귀납법이 논리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란 그저 개연성이나 합리적인 신념일 뿐이라는 점을 잊지 않으려는 경향이 더욱더 증대하고 있으며, 또한 과학 상의 성과들을 오직 특수한 작용에서만 그 타당성이 검증될 수 있는 일반적인 규칙이나 지침으로 간주하려는 생각도 더욱더 강해지고 있다."
"인간은 어디로 보나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복잡한 자연의 존재물이며, 그래서 당연히 인간의 행위에 대한 연구에는 자연과학자들이 직면하는 어려움과는 다른 종류의 어려움이 포함되어 있다.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사회과학자, 역사가, 자연과학자의 목표와 방법이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점일 뿐이다."
"관찰의 과정이 관찰되고 있는 것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기도 한다는 것 또한 진리이다."
"원칙적으로 나는 역사가의 연구방법과 과학자의 연구 방법을 갈라놓고 있는 그 차이들을 넓히기보다는 좁히기를 바라 고 있지만, 그렇더라도 불완전한 유사성에 의존하여 이 차이들을 감쪽같이 감추려고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과학이란 용어에는 수많은 다양한 방법과 기술을 이용하는 다양한 지식 분야들이 포괄되어 있으므로, 역사를 과학에 포함시키려고 하는 사람들보다는 역사를 배제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의미심장한 것은 그 배제해야 한다는 논의가 자기들만의 특별한 동아리에서 역사가들을 배제시키고 싶어하는 과학자들이 아니라 인문학의 한 분야로서의 역사의 지위를 옹호하고 싶어하는 역사가들이나 철학자들에게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학자, 사회과학자, 역사가는 분야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가 동일한 연구를 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과 환경에 관한, 다시 말하여 환경에 대한 인간의 그리고 인간에 대한 환경의 영향에 관한 연구이다. 연구의 목표도 동일하다: 그것은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지배를 증진시키는 것이다. 물리학자, 지질학자, 심리학자, 역사가의 전제와 방법은 세세한 부분에서는 크게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역사가가 더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더욱 충실하게 물리학의 방법을 따라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역사가와 자연과학자는 설명해야 할 기본적인 목적과 문제를 제기하고 대답하는 기본적인 방법에서는 똑같아진다."
"역사가는 과거를 이해하려는 충동을 가진 까닭에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답변들을 단순화하는 일, 답변들의 상하관계를 정하는 일, 혼잡한 사건과 혼잡한 특수한 원인에 일정한 질서와 통일을 부여하는 일 등을 동시에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가가 원인을 다양화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단순화하는 작업도 해야만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역사도 과학과 마찬가지로 이렇듯 이중적이면서 명백히 모순적인 과정을 통해서 전진하는 것이다."
"역사가와 그의 원인의 관계는 역사가와 그의 사실과의 관계와 똑같이 이중적이고 상호적인 성격을 가진다. 원인은 역사과정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을 결정하며, 그의 해석은 원인에 대한 그의 선택과 배열을 결정한다. 원인의 등급화, 즉 어느 하나의 원인이나 어느 일련의 원인들 혹은 또다른 일련의 원인들의 상대적인 중요성을 가려내는 것이 그의 해석의 핵심이다."
"과학자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역사가의 세계도 사진을 찍어놓은 것과 같은 현실세계의 복사판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역사가가 효과적으로 현실세계를 이해하고 지배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작업 모델이다."
"절대적 진리라는 개념 역시 역사의 세계에는 부적합한 -아마 과학의 세계에도 그러리라고 생각되지만- 것이다."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을 강조한다는 것은, 그동안 역사학이 포함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인문학의 문제에 대한 언급을 필수적으로 필요로 한다.
"17세기와 18세기 그리고 19세기 내내 지배적이었던 고전적인 인식론들은 모두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객체라는 뚜렷한 이분법을 전제했다. 철학자들이 구성한 모델은 인식의 과정이야 어떻든지 간에 주체와 객체, 그리고 인간과 외부세계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난 50년 동안 철학자들이 그 인식론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여, 인식 과정은 주체와 객체를 뚜렷하게 분리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그것들의 상호관계와 상호의존을 일정한 정도까지 포함하는 과정이라고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과학에 대해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나는 맨 처음의 강연에서 역사연구는 전통적인 경험주의의 인식론과 조화되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이제 나는 사회과학 전체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인, 검사자이면서 동시에 검사대상인 인간과 관계하므로, 주체와 객체의 엄격한 분리를 선언하는 어떤 인식론과도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 편견에 따르면 인문학은 지배계급의 폭넓은 교양을 일컫는 것으로, 그리고 과학은 그 계급에게 봉사하는 기술자의 기능을 일컫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인문학(humanities)'과 '인문적(humane)'이라는 용어들은 그 자체가 낡은 편견의 유물이다."


서구의 문제이긴 하지만 역사에 신의 뜻이 개입하는 것도 정당하지 않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진지한 천문학자가 된다는 것과 우주를 창조하고 정돈한 어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양립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제멋대로 행성의 경로를 변경시키려고, 일식이나 월식을 지연시키려고, 우주의 운동 규칙을 바꾸려고 끼어드는 어떤 신을 믿는다는 것과는 양립할 수 없다."
"다시 신부(1888-1976. 영국의 카톨릭 사상가) …… "어떤 연구자든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고 말함으로써 역사의 모든 문제에 대답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현세의 사건들과 인간의 드라마를 최대한 말끔하게 처리하기 전까지 우리에게는 더 폭넓은 성찰을 이끌어들이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역사의 완결성은 역사의 의미와 중요성을 좌우하는 어떤 초역사적인 힘- 그 힘이 선택받은 사람들의 신이건, 기독교의 신이건, 이신론자(理神論者)들의 보이지 않는 손이건, 아니면 헤겔의 세계정신이건 간에 -에 대한 신념과 조화되기 어렵다고 본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역사 속에서 태어난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는 입장권을 제공받는 경우란 결코 없다. 역사가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신학자 이상으로 결정적인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도 역시 보다 덜한 악과 보다 큰 선이라는 명제에 의지한다."


역사는 변화여서 진보를 정의하는 문제가 필연적으로 따른다. 그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역사란 투쟁의 과정이며 그 과정 속에서의 결과는, 우리가 그것을 좋다고 판단하건 나쁘다고 판단하건,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그러나 간접적인 경우보다는 직접적인 경우가 더 많은데- 다른 집단들을 희생시킨 어떤 집단들이 성취하 는 것이다. 패배자들은 대가를 치른다. 재난은 역사에 고유한 것이다. 역사의 모든 위대한 시대에는 그 시대의 승리자뿐만 아니라 희생자도 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더 작은 악을 선택하는 일에, 혹은 어쩌면 선을 낳을지도 모를 악을 행해야 하는 일에 우리가 때때로 인정하고 싶어하는 경우보다 더 자주 말려들고 있다. 역사에서는 이 문제가 '진보의 대가'라든가 '혁명의 보상'이라는 특별한 제목 아래 종종 토의되고 있다. 이것은 잘못이다. 베이컨이 <혁신론>이라는 논설집에서 말하고 있듯이, '인습의 완강한 유지는 혁신만큼이나 난폭한 것이다.' 특권이 없는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보수(保守)의 대가는 특권을 빼앗긴 자들에게 부과되는 혁신의 대가만큼이나 무거운 것이다. 누군가의 행복은 다른 누군가의 재난을 정당화한다는 명제는 모든 통치형태에 잠재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것은 급진적인 것만큼이나 보수적인 교리이다."
"달리 비유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역사나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도덕적 교훈들은 은행의 수표와 같다고도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인쇄된 부분과 써넣을 부분이 있다. 인쇄된 부분에는 자유와 평등, 정의와 민주주의 같은 추상적인 단어들이 있다. 이 단어들은 필수적인 범주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에게 얼마나 많은 자유를 배당하려고 하는가, 우리가 누구를 우리와 동등한 사람들로 인정하는가, 게다가 어느 정도까지 인정하는가 등을 말해 주는 또 다른 부분을 채워넣을 때까지 그 수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우리가 때때로 수표에 기재하는 방식이야말로 역사에 관한 문제이다. 추상적인 도덕적 개념에 특정한 역사적 내용이 담겨지는 그 과정은 하나의 역사적 과정이다; 정말이지 우리의 도덕적 판단은 그 자체가 역사의 산물인 어떤 개념적 틀 안에서 내려진다."
"진정한 역사가란 모든 가치의 성격이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것임을 인정하는 사람이지, 자기가 생각하는 가치야말로 역사를 초월하는 객관성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다."
"역사의 종점을 가정하는 것은 역사가보다는 신학자에게나 더 어울릴 법한 종말론의 냄새를 풍기며, 역사의 밖에 목표를 두는 오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정해져 있는 종점이란 것은 확실히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당긴다; 그리고 역사의 진행을 자유를 향한 끊임없는 진보로 보았던 액턴의 견해는 냉랭하고 막막하게 보인다. 그러나 만일 역사가가 진보라는 가설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는 기꺼이 진보라는 것을 계속되는 여러 시대의 요구사항과 조건에 의해서 각 시대만의 특정한 내용이 채워지는 과정으로 간주해야만 하리라고 생각된다."
"분별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역전과 일탈과 중단 없이 곧장 일직선으로 전진한 그런 종류의 진보를 결코 믿지 않았다는 것, 따라서 가장 급격한 역전조차도 반드시 그 믿음에 치명타를 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보는 모든 사람에 게 똑같고 동시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의미할 수도 없다. 의미심장한 것은 요즈음의 저 몰락의 예언자들 거의 모두가, 다시 말해서 역사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한 채 진보는 끝났다고 생각하는 저 회의주의자들 거의 모두가 몇 세대 동안 문명을 전진시키는 일에서 지도적이고도 두드러진 역할을 의기양양하게 수행했던 바로 그 지역이나 사회계급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다."
"19세기의 사상가들은 흔히 역사의 진보에는 일정할 뿐만 아니라 명백하게 규정될 수도 있는 어떤 목적이 있다는 관념을 자명한 것으로 간주했지만, 그 관념이 적합하지도 않고 쓸모도 없다는 것은 이미 밝혀졌다. 진보에 대한 신념은 자동적이거나 필연적인 과정에 대한 신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잠재력의 부단한 발전에 대한 신념을 의미한다. 진보는 추상적인 용어이다; 그리고 인류가 추구하는 그 구체적인 목적들은 그때그때마다 역사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역사의 밖에 있는 어떤 원천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인간의 완전성이나 미래의 지상천국을 믿지 않는다. 이 정도까지라면 나도 역사에서는 완전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과 신비주의자들에게 동의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그것을 향해 전진해야만 밝혀질 수 있고, 획득하는 과정 속에서만 그 타당성이 입증될 수 있는 목표들을 향해서 나아가는 무한한 진보- 바꿔 말하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거나 상상할 필요가 있는 어떠한 한계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 진보 -의 가능성에 찬성할 것이다. 그리고 얼마간이라도 그러한 진보의 개념이 없이 어떻게 사회가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역사과정에서 눈에 띄는 모든 발명, 혁신, 새로운 기술에는 그 긍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부정적 측면도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 400년 동안의 영어사용권 세계의 역사가 역사상 위대한 시기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역사를 세계사의 중심으로 취급하고 그 밖의 모든 역사를 주변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관점의 부당한 왜곡이다."


그리고 저자는 서두에서 밝혔던 이 책을 쓰게 된 목적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글을 맺는다.
"그러나 나를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영어사용권 세계의 지식인들과 정치사상가들 사이에서 이성에 대한 신념이 약화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계에 대한 그 충만한 감각이 상실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언뜻보기에는 역설적인 것처럼 생각된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서 진행되는 변화에 관한 피상적인 이야기들이 요즘처럼 자주 들렸던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변화가 더 이상 성취로, 기회로, 진보로 생각되지 않고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정치 및 경제 전문가들이 처방을 내릴 때, 그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란 급진적이고 원대한 이념은 믿지 말라는 훈계, 혁명의 냄새가 나는 것은 모조리 피하라는 훈계, 또는 -만일 우리가 전진할 수밖에 없다면- 가능한 한 천천히 조심스럽 게 전진하라는 훈계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세계의 모습이 지난 400년간의 그 어느 때보다 더 급속하고 더 철저하게 변화하고 있는 이때에, 그런 처방은 일종의 굉장한 무지라고 생각되거니와, 그 무지 뒤에 들어서는 것은 세상이 멈춰버릴 것이라는 불안감이 아니라 이 나라가 -아마 다른 영어 사용권 나라들까지도- 전반적인 진보에 뒤쳐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 그리고 무기력하게 또한 체념한 채로 어떤 향수 어린 침체상태에 빠져들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인 것이다. 나 자신으로 말하면, 나는 여전히 낙관론자이다; ...... 나는 격동하는 세계, 진통하는 세계를 내다보고 나서 진부하기 조차 한 어느 위대한 과학자의 말을 빌려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래도 - 그것은 움직인다.""

이 책은 줄곧 인문학 고전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역사학을 과학으로 본다. 그리고 그 견해는 타당하다. 그래서 인문학 고전 중에서도 실제로 읽어 보아야 할 진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프스트에서 상당한 내용을 요약해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읽어 볼 필요가 충분하다. 강력 추천 목록에 올린다.



진상 손님 등급 정치, 사회

http://cafe.daum.net/ssaumjil/LnOm/1726044?svc=livestory


짤방 이미지는 일본어로 되어 있어서 당연히 번역이 필요하다. 번역을 하면 다음과 같다.
접객일을 하면서 뽑은 귀찮은 손님 랭킹
3위 일본어가 안 통하는 외국인 관광객
2위 일본어도 영어도 안 통하는 중국인
1위 일본어가 안 통하는 일본인


물론 이건 웃자고 한 이야기다. 그런데 1위를 한 내용이 의미심장하다. 일본인이 일본어로 의사소통이 안된다면 그건 유머가 아니고 심각한 문제 아니겠나. 이게 더 심각하게 와 닿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민국 대통령하고 소통이 안된다. 기사를 보자.

http://www.cbci.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7100

"박근혜 대통령이 구정 연휴에 들어가기 전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초청해 기자회견을 여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한편 박근혜 대통령은 그간 상식을 뛰어넘는 화법으로 '유체이탈화법', '영매 어법', '불통군왕의 어법', '수첩 공주' 등 다양한 수식어를 들었다. 최종희 언어와생각 소장은 지난 3일 SBS라디오 '박진호의 시사전망대'에 출연해 박근혜 어법을 두고 단어의 뜻을 모르고 쓰는 경우가 허다하며 주어와 목적어 등 문장의 기본 서술 구조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내뱉는 하등 저급 수준의 언어라는 혹평을 내렸다."


탄핵되어 직무 정지된 인간이 헌재나 특검에는 출석하지 않고 기자들을 불러다 자기 하소연을 늘어놓고는 그 짓을 또 하겠단다. 이쯤되면 '한국말이 안통하는 한국인'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언어 구사 수준도 '하등 저급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으니, 이럴 때 우리는 점입가경이라는 말을 쓴다. 한마디로 가관인 것이지.

그런데 이런 박근혜의 화법을 알아듣는 인간들이 있다. 최순실과 그 일당들, 그리고 박사모와 여전히 박근혜 쉴드치기 바쁜 일베들이다. 이들의 소통을 보여주는 동영상이 있다. 한번 보자.




아기들에게 미안하기는 하다. 비교 할 걸 비교해야지. 아무튼 박근혜나 최순실의 한국말을 이해하기가 힘들어서 너무나 충성스러운 정호성이 녹음을 했다 한다. 그 녹음 파일이 박근혜를 잡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거 참. 세상 일이란 이래서 아무도 모르는 법이라 하는 모양이다.





알파고가 이세돌에게 져 주었다고? 그래서. 정치, 사회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462964

인공지능 알파고가 인간 바둑을 이긴지 벌써 일년이 다되어 간다. 그 알파고가 익명으로 인터넷 바둑에서 프로 기사들을 상대로 60연승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고 다시 등장했다. 그런데 그 전의 이세돌과의 대국에서 알파고가 일부러 져 주었다는 기사가 떳다. 한번 보자.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701127449g

"작년 3월 ‘세기의 대결’에서 인공지능(AI) 알파고에 이세돌 9단이 거둔 1승조차 알파고를 개발한 구글 딥마인드가 일부러 져준 것이란 주장이 나왔다."
"김 교수의 주장은 나름의 가설을 세우고 검증을 거친 결과다. 구글 딥마인드가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는 이상 ‘합리적 추론’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설명. 일종의 소거법이다."
"최근 전세계 바둑 고수들과의 온라인 대국에서 60연승을 달린 뉴 알파고가 화제가 되면서 공개적으로 의혹을 제기하기로 결심했다는 김 교수는 “이세돌에 져줬다”는 사후적 주장 못지않게 “구글 딥마인드의 사과와 재발 방지가 필요하다”는 주문에도 방점을 찍었다."


나도 알파고가 5:0으로 이길 것이라고 보았는데 한판을 져서 의아하긴 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구글이 한판 져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판 져 준 것을 가지고 구글더러 사과를 하라고 요구를 했단다. 진짜로 구글이 져 주었는지 아니면 프로그램 버그인지는 구글이 실토하지 않는 이상 알 길은 없다.

하지만 구글의 입장에서 추론을 해 볼 수는 있다. 구글은 사기업이다. 이익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그들 입장에서 알파고가 인간을 5:0으로 이겨버리는 것이 유리할까? 아니면 한판 져 주는 것이 유리할까? 그 이후에 대중들이 보인 반응을 보면 한판 져주는 것이 훨씬 사람들에게 안도감과 경이로움을 주었다. 구글로서는 대성공이었다. 인공지능의 역량을 제대로 드러내 보이면서도 인간의 자존심을 무참하게 짓밟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정말 구글이 져 준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구글의 전략에 대해 왜 사과를 요구할까? 구글은 무슨 잘못을 했길래 김교수는 구글이 사과해야 한다고 하나?

꼴통들이 지극히 사적인 개인 공간인 블로그에서의 오류를 핑계로 사과를 요구하곤 한다. 그것이 사과해야 할 공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이 그저 상대방의 약점을 잡았다 싶으면 사과하라고 대드는, 꼴통들이나 하는 짓을 전문가가 하고 있다. 스스로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인간들의 결벽증은 문제다.





역사란 무엇인가 - E. H. 카 I 독서

역사학은 사회과학의 한 분과라고 할 수 있지만 여전히 인문학으로 분류된다. 또 사람들은 미래를 알기 위해 마찬가지로 과거를 알고 싶어한다. 이런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역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과학의 발전에, 특히 진화론의 발전에 역사가 깊이 개입한다. 역사는 과학일까? 아닐까? 이 질문에 역사학은 과학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역사학자가 있다. 바로 에드워드 카이다.



저자가 제목을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형태로 붙였지만 역사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 만을 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나의 결론은 파괴와 쇠퇴 이외에는 아무것도 내다보지 않으면서 진보에 대한 모든 신념과 인류에 의한 더 나은 진보에 대한 모든 전망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배제해버리는 오늘날의 회의주의와 절망의 조류는 엘리트주의의 한 형태- 위기에 의해서 자신들의 안전과 자신들의 특권을 가장 현저하게 침식당해 온 엘리트 사회집단의 산물, 그리고 한동안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확실한 지배권을 박탈당해버린 엘리트 국가들의 산물 -라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의 주된 창도자들은 지식인들, 즉 자신들이 봉사하고 있는 그 사회의 지배집단의 이념을 전파하는 자들('한 사회의 이념은 그 사회의 지배계급의 이념이다')인 것이다."

인간은 모든 현상을 이원론적 관점에서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과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육체, 우연-필연, 성격에서의 본성-환경 영향 등이 대표적인 이원론적 관점이다. 문제는 이원론적 관점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원론의 한쪽만을 강조할 때이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 대 비관적 전망, 사실과 해석, 주체와 객체, 보편성과 특수성 등이 그것이다,
"액턴(1834-1902. 영국의 역사가) … 1896년 10월의 보고서 …… 거의 정확하게 60년이 지난 후에 교수인 조지 클라크 경 (1890-1979. 영국의 역사가) …… 액턴은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긍정적인 신념과 분명한 자신감을 표명하고 있다; 조지 클라크 경은 비트 세대의 방황과 혼란스러운 회의주의를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려고 할 때, 우리의 대답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 자신의 시대적 위치를 반영하게 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더욱 폭넓은 질문에 대한 대답의 일부가 된다."
"영국의 역사가들이 역사철학에 끌려들어가기를 거부한 이유는 역사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의 의미란 절대적이고 자명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9세기의 자유주의적 역사관은 자유방임(laissez-faire)의 경제학설- 이것 역시 천하태평의 자신감에 찬 세계관의 산물이었지만 -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누구나 자신만의 일에 힘써라, 그러면 보이지 않는 손이 보편적인 조화를 이끌어줄 것이다. 역사의 사실 그 자체도 보다 더 나은 상태를 향한 진보가 은혜롭게 그리고 분명히 끝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그 지고(至高)한 사실의 표현이었다."
"역사의 사실에 대한 역사가의 관계를 검토해 온 우리는 분명히 불안정한 상태, 즉 역사란 사실을 객관적으로 편찬하는 것이며 해석보다는 사실이 무조건 우월하다고 보는 타당치 못한 역사이론의 스킬라와 역사란 해석과정을 통해서 역사의 사실들을 확정하고 지배하는 역사가의 정신의 주관적 산물이라는 마찬가지로 타당치 못한 역사이론의 카리브디스 사이에서, 과거에 무게중심을 두는 역사관과 현재에 무게중심을 두는 역사관 사이에서 어렵사리 항해하는 그런 상태에 놓이게 된 셈이다."
"역사가의 곤경은 인간의 본성을 반영한다. 인간은, 아마도 아주 어렸을 때나 아주 늙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환경에 완전히 매몰되지 않으며 무조건 그것에 예속되지도 않는다. 그런 반면, 인간은 결코 그의 환경에서 완전히 독립적일 수 없고 그것의 무조건적인 지배자일 수도 없다. 인간과 그의 환경의 관계는 역사가와 그의 연구주제의 관계와 같다."


이런 이원론적 관점을 극복하면서 역사가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저자는 이야기한다.
"사실은 문서 안에 있건 없건 역사가에 의해서 처리되어야만 하며, 그런 후에라야 비로소 역사가는 그것들을 어떻게든 이용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역사가가 사실들을 이용하는 것이 곧 그 처리과정인 것이다."
"역사가의 기능은 과거를 사랑하거나 자신을 과거로부터 해방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서 과거를 지배하고 이해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나는 역사가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역사가에게는 경제 학자가 '투입(input)'과 '산출(output)'이라고 부르는 그 두 과정이 동시에 진행되며, 또 실제로 그 두 과정은 단일한 과정의 부분들이라고 확신한다. 만일 그것들을 분리시키거나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우월한 것으로 삼고자 애쓴다면, 여러분은 두 가지 이단론들 중의 어느 하나에 빠지게 된다."
"역사가는 그의 사실들의 비천한 노예도 아니고 난폭한 지배자도 아니다. 역사가와 그의 사실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 관계이다."
"역사가는 자신의 해석에 맞추어 사실을 만들어내고 또한 자신의 사실에 맞추어 해석을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과정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둘 중 어느 한쪽을 우위에 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회와 개인은 분리될 수 없다; 그것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고 보완적인 것이지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역사를 상호작용의 과정으로, 현재의 역사가와 과거의 사실 사이의 대화로 설명했다."
"역사는 이 말의 두 가지 의미에서 -역사가가 수행하는 연구와 그가 연구하는 과거의 사실이라는 두 가지 뜻에서- 하나의 사회적인 과정이며, 개인은 그 과정에 사회적인 존재로서 참여한다."
"역사는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의 관계를 다룬다. 여러분이 역사가라면, 사실과 해석을 분리시킬 수 없듯이, 그 두 가지를 분리시키거나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우월한 것으로 취급할 수 없다."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또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그 두 가지 모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진전시키는 데에 있다."
"역사에서의 예언의 문제에 관한 실마리는 이렇게 일반적인 것과 특수한 것, 보편적인 것과 유일한 것을 구별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역사가는 일반화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역사가는, 비록 특정한 예언은 아니더라도, 미래의 행동에 대한 타당하고도 유용한 일반적인 지침을 준다. 그러나 그는 특정한 사건을 예언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특정한 것은 유일하기 때문이며 또한 거기에 우연이라는 요소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별은 철학자들에게는 성가시겠지만 보통사람에게는 완전히 명백하다."
"그 문제에서도 우리는 합리적인 원인과 우연적인 원인을 구별한다. 합리적인 원인은 다른 나라, 다른 시기, 다른 조건에 서도 언젠가 적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결국 유익한 일반적인 원인이 되며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 것은 우리의 이해를 확장시키고 심화시킨다는 그 목적에 기여한다. 우연적인 원인은 일반화될 수 없다; 또한 그것은 그야말로 말 그대로 독특한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교훈도 가르쳐주지 않으며 어떠한 결론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역사는 전통의 계승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전통은 과거의 관습과 교훈을 미래로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의 기록은 미래의 세대를 위해서 보존되기 시작한다."
"역사의 사실들은 순수하게 객관적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역사가가 부여하는 의미에 의해서만 역사의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에서의 객관성- 만일 우리가 그 판에 박힌 용어를 여전히 사용하기로 한다면 -은 사실의 객관성일 수 없으며, 오로지 관계의 객관성, 즉 사실과 해석 사이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의 관계의 객관성일 수 있을 뿐이다."
"가치는 사실에 개입하여 그것의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장치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주변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과 주변환경을 우리에게 적응시킬 수 있는 능력, 즉 역사를 진보의 기록으로 만들어온 저 주변환경에 대한 지배력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우리의 가치들을 통해서 마련된다. 그러나 인간과 환경의 투쟁을 과장하여 사실과 가치를 부당하게 대립시키거나 부당하게 분리시키지 말아야 한다. 역사에서의 진보는 사실과 가치와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성취된다. 객관적인 역사가란 이러한 상호과정을 가장 깊이 통찰하는 역사가인 것이다."
"역사가는 사실과 해석, 사실과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사람이다. 그는 그것들을 분리시킬 수 없다."


다음 글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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